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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30년전 동업 시작할 때 약속 모두 지켜서 만족해요”


송만호 유미과학문화재단 이사장. 
<송만호 유미과학문화재단 이사장>

송만호(71) 유미과학문화재단 이사장은 30년 동안 재직한 유미특허법인(이하 유미)에서 지난 29일 퇴임했다. 유미는 한해 1만 건 이상의 특허·디자인·상표 출원을 하는 국내 최정상급 특허법인이다. 변리사와 변호사 직원만 100명이 넘는다. 송 이사장의 서울대 철학과 66학번 동기인 김원호 씨알재단 이사장이 81년 설립했다. 김 이사장 권유로 유미에 합류한 송 이사장은 친구와 지분을 절반씩 공유하며 회사를 키웠다. 유미의 이 두 대표변리사는 29일 함께 퇴임했다. 회사 지분도 다 내려놓았다.

29일 오전 서울 강남역 근처 유미 사무실에서 만난 송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동업을 시작하면서 ‘자식 승계는 안 된다, 70살이 되면 그만두자’고 약속했죠. 지난 20년 동안 매년 1~3%씩 지분을 후배 파트너 20여 명에게 넘겼어요.”

이런 승계는 법무법인엔 종종 있지만 특허법인에서는 처음이란다. “업계에 모범을 보이고 싶었어요.” 퇴임 전에 지분을 후배들에게 넘기는 승계의 장점은? “조직의 안정이죠. 혼자 다 가지고 있다 죽으면 회사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는 자신의 재산도 사회를 위해 다 쓸 생각이라고 했다. “아들딸 모두 자리를 잡아 안 물려줘도 됩니다.” 그와 김 이사장은 4년 전 1억5천만원씩 내놓아 유미과학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운영자금은 매년 유미에서 1억5천만원을 내놓는다. 이와 별도로 송 이사장의 사재 수억 원이 재단 운영에 들어갔단다. 재단은 매년 과학 대중화에 기여한 학자나 작가, 번역자를 뽑아 ‘유미과학문화상’을 준다. 상금은 3천만 원이다. 박문호의 자연과학세상(박자세), 조지형 빅히스토리 협동조합, 김용준 전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 등이 받았다.

그는 재단 설립 뒤 언론 인터뷰에서 합리적 사고나 건전한 상식이 사회에 뿌리내리고 사회 갈등의 해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고자 재단을 만들었다고 했다. “엠비 정부 초기인 2008년 기독교와 불교계 갈등을 보면서 종교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갈등 요인이란 걸 알게 되었죠. 종교가 ‘종교직업자’(성직자)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조직, 집단으로 싸우더군요. 사실은 알려고 하지 않고 ‘카더라’에 목숨 걸고 싸워요.” 답은 과학적 사고의 확산이었다. 그래야 “잘못된 인식이나 오해가 야기하는 갈등이 부질없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극락왕생, 성령 잉태, 7일 만의 천지창조… 이런 건 다 신화입니다. 그런데 종교직업자들은 다 사실이라며 돈만 걷으려고 하죠.”
 

국내 최정상 유미특허법인 대표 퇴임
‘철학과 동기’ 김원호 대표와 나란히
“70살때 지분 자식 대신 회사에 환원”

‘사회갈등 해법 찾자’ 재단 공동설립
 사재 털어 ‘유미과학문화상’ 등 운영
 상금 1억 ‘과학사적 빅히스토리’ 공모

 

그가 과학에 푹 빠진 계기는 김용준 교수의 책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돌베개, 2005년)를 만나면서다. 50대 후반에 과학책을 섭렵하기 시작했단다. “과학과 종교는 대척이잖아요. 김 교수가 어떻게 연결하는지 흥미를 가지고 봤어요. 철학과 신학, 자연과학 등 각 분야가 다 있어요. 저자가 읽은 책을 요약해 설명하는데, 보물창고였어요.” 그 뒤 지금껏 그가 열의를 가지고 공부한 분야는 우주론과 지구과학, 생명과학, 뇌과학이다. “우주 만물의 시원인 수소부터 인간의 인식까지 포괄적으로 공부했죠.”

재단은 오는 10월 31일까지 상금 1억 원을 걸고 ‘과학사적 빅히스토리’ 원고를 공모한다. 이는 ‘자연과학적 빅히스토리 위에 통합적 역사를 구축하겠다’는 송 이사장의 원대한 꿈을 향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과학적 사고는 부분·단편·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폭넓게 보고 남의 처지도 헤아리는 것입니다. 과학자들도 과학의 일부만 봐요.” 학제간 칸막이를 치우고 자연과학과 철학·문화·종교·생활을 통합적으로 쌓아 올려야죠. 그게 바로 과학적 사고입니다. 한 사람이 할 순 없어요. 동아리를 만들 겁니다. 뇌과학과 철학을 융합하는 동아리는 뇌과학책 번역자 중심으로 이미 꾸렸죠.”

그는 대학 졸업 뒤 10년 정도 다른 일을 하다 변리사 시험에 도전했다. “무역업도 해봤고, 건설사 중동 현장에도 갔었죠. 다니던 회사가 은행관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변리사 시험을 봤어요. 먼저 합격한 김 이사장의 영향이 컸지요.”

90년대 초만 해도 변리사 사무실이 사무장 중심으로 돌아갔다. 대기업 특허도 별로 없었다. 이때 그는 ‘국내기업의 국내 출원, 외국기업의 한국 출원, 국내기업의 국외 출연’으로 3분해 영업을 하는 전략을 제시했단다. 당시엔 선도적 전략이었다. “외국 특허사무소를 공략해 한국에 특허 출원을 할 때 우리가 대리하겠다고 했죠. 이렇게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하니 국내기업의 국외 출원도 유미가 앞서 나갔어요.”

철학과는 왜? “철학이 없어 나라가 어렵다고 해서, 철학을 만들겠다는 애국심으로 선택했어요. 철학이 뭔지도 모르고 졸업했지만, 하하.” 그는 30여 년 변리사 인생에 만족한단다. “제가 변리사로 활동한 시기가 마침 한국이 급격히 고도산업화를 이룬 때였어요. 대기업들이 특허를 많이 내고 세계적으로 수출도 많이 했죠. 스마트폰 하나에 특허가 1만 건이나 됩니다. 중국이 지금도 어려움을 겪는 게 우리와 달리 특허장벽을 구축하지 못해서죠. 이 장벽 구축에 시간이 오래 걸려요. 연구나 생산직원이 주연이고 우리는 조연이죠.”

‘50년 지기’ 김 이사장과 닮은 꼴이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둘 다 사치하고 위세 떠는 걸 저급으로 보는 삶을 살았어요. 명색이 철학과 들어간 사람인데 그렇게 살면 되겠어요. 사는 데 큰돈 안 듭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밥 사줄 돈 정도 있으면 되죠.”


[한겨레 신문 2018. 7. 2일 자]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1421.html#csidxfc9dd13e6be2caba6ac4e420a5f02d4